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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의영화관] 공주의 시간에 들어가보기 : <한공주>(2014)

공주의 시간에 들어가보기 : <한공주>(2014)

 

스머프 (여는 민우회 회원)

 

 

 

개인적인 사정으로 장기간 병원에 머문 일이 있다. 딱히 인생에 큰 상처를 남긴, 그런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부침을 겪은 일로 그러했다. 사람들은 잊고 나아가길 원했고, 나 또한 그랬다. 퇴원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그 때의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지만, 문득 병원에서의 시간이 떠오를 때가 있다. 가끔 병원을 찾을 때, 싸한 약품 냄새를 맡을 때, 가운 입은 사람들을 볼 때,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그 때의 시간이 떠오르곤 한다. 깨진 향수병 사이로 향이 범람하듯, 과거의 시간이 현재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어떤 일은 그렇다. 사람이 사는 시간을 다르게 만들고, 공간의 의미를 뒤바꿔놓는다.

 

 그런 시간을 지낼 무렵,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선의를 가지고 다가와 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억한 심정이 들 때가 있곤 했다. 가령 누군가 나에게 다 이해한다.’, ‘다 알고 있다.’와 같은 이야기를 할 때, 괜찮으니 이제는 털고 나갈 때라는 말을 할 때, 나는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대체 뭘 이해했다는 걸까. 대체 뭘 알고 있다는 걸까. 내가 어떤 시간을 지내왔는지 알면 모두 다 아는 걸까. 저 사람은 내가 싸한 알콜 냄새, 흰 옷, 구름 낀 날씨를 보면 뭘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정말 알고 있는 걸까.

물론 이런 식의 반감은 나로서도 난감했다. 어쨌든 모른 척 하는 것 보다야, 그렇게라도 다가와 주는 것이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안에는 상충된 욕구가 계속 존재했다.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주길 바라면서도, 계속해서 나와 상대방의 간극을 확인하고픈, 손쉽게 우리가 한 시간 안에 있다 말 하지 않으려는 욕구.

 

 

 

사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지는 일. 영화 속의 공주도 그런 일을 겪는다. 다만 공주의 경우 그 일이 일상적인 부침의 수준을 넘어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공주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다. 그리고 그 경험은 공주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그녀에겐 사실이라는 단어도, 고장 난 선풍기도, 깜빡이는 전등도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들은 공주의 시간 속으로 과거를 호출한다. 영화 내내 공주의 친구 화옥이 유령처럼 그녀 주변을 배회하듯, 공주의 시간 속엔 과거의 시간이 배회한다.

때문에 이 영화의 구성, 공주의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의 순간들이 파편처럼 흩뿌려진 구조는 중요하다. 2시간 가까운 영화에서 공주가 나오지 않는 장면이 거의 부재한 것처럼, 이 영화는 철저히 공주의 시선을 따른다. 화옥도 공주의 과거도 그녀가 현실에 특정 상황, 장소, 물건을 마주할 때 등장한다. 말하자면 영화는 사건 이 후 공주에게 세상은 어떻게 다가오며, 그로인해 어떻게 그녀의 일상 속으로 과거가 밀려오는 가를 보여준다. , 영화는 공주의 시간을 재현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공주의 자리에 서서 그 시간들을 체험해보는 일에 가깝다.

 

 영화의 초반, 수영을 배우려는 공주에게 수영장 직원은 말한다. 물에 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문제라고. 끊임없이 교차되는 수영장면과 일상장면이 은유하듯, 공주의 일상은 수영과 같다.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호흡조차도 위태위태한 수영처럼, 인간관계는커녕 머물 곳을 마련하는 것조차 마땅찮은 일상도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공주의 친구들은 넌 뭐가 그렇게 어렵냐며 그녀와 갈등하곤 한다. 어떤 이에게, 물살을 헤치고 나가는 것은 별것 아닌 일이라 다 가봐야 벽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주는 그 벽까지만 가봤으면 소원이라고 말한다. 이 간극이 크면 클수록,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의 외로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보았다고 해서, 우린 공주를 알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공주를 손쉽게 갈무리하고, 분노나 혹은 연민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 영화는 공주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주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주를 연민해달라고, 혹은 공주를 위해 분노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공주가 자신의 자리에서 본 것들, 들은 것들, 겪은 것들을 차분히 제시할 뿐이다. 시종일관 밀착된 카메라와 공주처럼, 관객과 공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공주를 연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연민하는 나와 대상의 거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연민은 안전한 감정이다. 하지만 영화에는 애초부터 그런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고집스레 관객들을 공주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

때문에 영화를 보고난 주변이들 중, ‘공주는 참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외로웠다는 반응, 가슴이 답답했다는 반응,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는 반응. 나 또한 그랬다. 영화가 끝나면 빨리 극장을 뛰어나가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세 번 보았지만, 그때마다 깨닫는 건 이 영화를 거리를 두고 보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한공주는 기억으로도 남지만 무엇보다 감각으로, 감정으로 남는 영화다. 그리고 이것이 생생한 만큼, 내게 공주는 한 명의 생생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생존자들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하지만,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우리의 역할을 낭만화하려는 것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냉정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공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소외감과 외로움을 크게 느꼈다면, 그만큼 실제의 우리는 공주와 같은 이들에게 벽이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영화의 마지막, 허우적거리길 반복하다 물살을 헤치고 가는 공주는 결국 혼자다. 드넓은 강 위의 점 하나, 그렇게 공주는 혼자의 힘으로 물길을 열어나간다.

하지만 그 장면 위로 공주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마치 합창처럼, 공주를 응원하고 기뻐하는 함성들. 영화의 시작, 공주에게 음악은 종교 같은 거냐는 질문에 공주는 답한다. 그렇다고, 힘은 되지만 현실에는 없노라고. 이런 점에서 첫 장면의 대사와 마지막 장면은 묘한 연결지점을 가진다. 프레임 속에 사람들은 없지만, 음악처럼 소리로서 이들은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는 견고한 시간의 벽을 뚫고, 공주의 현실을 온전히 함께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무수한 목소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한 크고 밝게 응원하고 싶다. 공주를, 그리고 또 다른 공주들을.

  • 햇살 2014.05.23 17:51

    글잘읽었네요..공주의 삶을.. 내가 모르면서 안다고 쉽게 말했던가..되짚어봅니다! 그럼...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은 어떤가? 생각도하고..

  • 바나나아니야 2014.05.26 13:25

    이 영화를 볼까말까 고민 했는데 스머프 글을 읽으니 영화를 보고 싶어지네요

  • 허허꼬깜 2014.05.26 15:53

    나도 힘들까봐 고민했는데 스머프 글 보고 봐야겠다 합니다. 연민은 얼마나 간편한 감정인지 ...다시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