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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머프의영화관] 그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을까? : <웬디와 루시>(2008)

그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을까? : <웬디와 루시>(2008)

 

스머프(여는 민우회 회원)

 

 

영화 <웬디와 루시> (Wendy And Lucy, 2008)는 이런 영화!

 

 

주인공 웬디 캐롤 은 88년형 혼다 어코드, 그리고 아마도 사냥개와 리트리버의 혼종인 듯 보이는 개, 루시와 함께 알라스카로 향하는 중이다. 알라스카 생선 통조림 공장에서 돈을 벌기위해서다. 웬디는 먼거리를 주행해왔고 또한 먼거리를 주행해야한다. 그런데 오리건에서 그녀의 차는 시동이 멈춘다. 설상가상으로 대형마트에서 강아지 사료를 훔치던 그녀는 경찰에 연행되고, 그 사이 사랑하는 루시는 없어지고 만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웬디와 루시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줄거리랄 것도 딱히 없고 발생하는 사건들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놓여 있으며 이렇다 할 반전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내장한 도전의식과 우리에게 던져주는 신선함은 만만치 않다. <웬디와 루시>는 아주 나지막한 음성으로 오늘날의 제국, 미국의 가장자리를 드러낸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규칙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돼야 해요. 개 먹이도 못 사는 사람이 개를 키우면 안 되죠.’

 

 영화 초반, 주인공 웬디는 도둑질을 감행한다. 차가 고장이나 낯선 타지에 발이 묶인 상황, 생활비는 점차 줄어가고 설상가상 반려견 루시에게 줄 사료조차 바닥난 탓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게 점원에게 적발되고 만다. 가게 점원은 그런 그녀를 경찰에 신고하고자 한다. 글머리에 인용된 대사는 그가 상사를 설득하며 한 말이다.

 영화 내 웬디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사실 영화에 제대로 된 악역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이 가게점원 뿐이다. 그는 웬디를 적극적으로 곤경에 밀어 넣는 유일한 인물이며, 그녀가 루시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웬디가 경찰서에 간 사이, 루시는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관객과 웬디의 가슴을 후벼 파는 대사를 뱉는 캐릭터다. ,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분노와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가 유일한 셈이다.(심지어 꼬질꼬질한 웬디와 달리, 그는 말끔한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이 글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너무 화가 나서다.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산산이 흩어지게 만든 주제에, 공정한 척 자기 독선에 가득 찬 그가 너무도 싫었다. 그리고 저 대사도 끔찍했다. 소원이라면 당장 모니터에 손을 집어넣어 힘껏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글이라도 쓰는 수밖에. 문제는 욱 하는 심정으로 키보드 앞에 앉은 것과 달리, 막상 그에게 할 말이 떠오질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환경을 고려치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가, 웬디에게 루시는 그나마 남은 가족이라 할 수 있는데, 돈이 없다고 그런 기본적인 유대관계까지 맺지 말라고 할 수 있는가, 등등. 하지만 내가 멈칫한 것은 그런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논리적인 문제보다는 감정적인 문제에 가까웠다. 허탈함과 공허함, 그를 비난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하는 생각. 특히나 이런 감정은 영화의 엔딩을 보며 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나.

 

 영화의 마지막, 웬디는 결국 루시를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돈이다. 웬디는 그토록 애타게 찾던 루시를 교외의 한 집에서 찾는다. 루시를 맡은 사람은 차와 정원이 딸린 집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웬디는 차도 사라지고, 당장 루시를 먹일 돈도 없다. 결국 웬디는 돈을 벌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막연한 약속만 남긴 채 뒤 돌아 선다. 결과적으론 개 먹이도 살 수 없으면 개를 키우면 안 된다는 점원의 말이 실현된 셈이다.

 영화 웬디와 루시가 가지는 특이점이 있다면, 이 영화에는 웬디의 대립항이라 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적대적 인물 뿐 아니라, 웬디의 상황을 극적으로 대비시킬 인물도 없다.) 심지어 영화에는 등장하는 인물조차 별로 없다. 마을은 비었고 사람도 일도 없다. 웬디는 고난에 빠지지만, 그것은 그녀의 반대편에선 적대적 인물 탓은 아니다. 차라리 웬디의 운과 상황, 그리고 사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모를까. 이를테면 갑자기 멈추어 버린 차라든가, 돈이 없어서 도둑질한 사람에게 벌금을 요구하는 형벌체계라던가 말이다. 그리고 이 고난의 종착점은 더욱 빈곤해진 웬디가 루시를 포기하는 것이다.

 

 

 웬디의 결정이 온전한 그녀의 선택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녀를 그런 선택으로 끌고 간 요소가 뚜렷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이러니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선 미칠 노릇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도출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다. 웬디는 원래 그런 세상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빈곤으로 살던 동네를 떠나고, 인간관계도 모조리 파괴 되 반려동물에게 의지하지만, 그나마도 능력이 안 되면 함께 살 수 없다는 세상 말이다. 누구하나의 입김 없이도, 빈곤한 사람은 그런 결과를 맡게 되는 세상. 그리고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가령 영화의 주인공 웬디를 살펴보자. 몇 차래 금융위기를 겪은 미국에서, 그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람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집도 날라 가고, 회사의 도산이나 공장의 해외 이전으로 일도 잃은 사람들, 가족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일을 찾아 떠돌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기가 빠듯한 사람들, 딱 웬디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영화 속 휑한 오리건의 모습은 어떤가. 1% 슈퍼리치에 관한 이야기와 경기호조 뉴스가 TV를 뒤덮어도, 이상하게 돈을 가진 사람도, 일을 가진 사람도 보이지 않는 현실과 맞닿아있지 않은가.

 

 

가게 점원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을까?

 

 사실 이렇게 결론을 두면, 이 영화의 유일한 악역, ‘가게 점원은 그다지 나쁠 것도, 특별히 이상할 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동네였고, 그는 세상 돌아가는 순리를 강변한 것뿐이니까. 물론 그가 옳은 소리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비해 그는 딱히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를 비난하려는 것은 맥이 빠지는 일이 되고 만다. 비난을 던질 인물을 찾았는데, 사실 알고 보니 그는 딱히 나쁘다고 할 것도 없는 사람이고, 진짜 문제는 더 막연하고 거대한 무언가(사회, 구조, 체제 등등)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를 다 보고난 다음, 망연자실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이건 정말 악랄한 사람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일이 아닌가.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우리는 미워할 사람을 찾곤 한다. 책임질 사람, 비난을 받을 사람.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 분노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지목한 사람은 근본적인 책임이 없거나 딱히 악인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생각해보면 이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현실과 마주해 무너지는데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책임을 짊어질 사람을 찾는 것이다. 마치 내가 영화를 보며 그러했듯 말이다. 그렇다고 나는 이 같은 반응을 부당한 것으로 치부하고 싶진 않다. 단지 부당한 것이 있다면, 사람을 이토록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세상이 아닐까.

  • 동감동감 2014.04.21 16:55

    책임질 사람, 비난 받을 사람 찾는 것에 신경이 집중 되지만 그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마음 놓고 미워할 수도 없고....그렇다고 원망을 놓아버릴 수도 없는 그냥그런 마음이...복잡하고 우울한 요즘입니다.

  • 꼬까미 2014.04.21 17:10

    스머프 잘 읽었습니다..맞아요...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운 그 무서운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악역을 쉽게 내주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끄덕이며 읽었어요. 이 반복들에 속이고 속히는 사람들을 보는게 슬프고 황망해지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무기력해지진 말았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힘내야 하는 순간이 올테니까.

  • 썬샤인 2014.04.25 00:57

    wow! 글 잘 읽었습니다. 시사하는 점이 커서 생각 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글이네요..ㅠㅠ 흠. 시대가 변해도, 크게 나아지는 게 없다는 것은 참 허탈하고 공허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아쉽다면 아쉽지만, 그래도 스머프님처럼 의식있는 분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 주신다면 언젠가 세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