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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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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2 16:13

∙ 스머프(여는 민우회 회원)

 

군대에 있던 시절 우울증을 앓았던 경험이 있다. 사실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심각한 상태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병원 진료를 받았다. 병원을 찾는 일은 여러 가지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이 진료가 기록에 남고 누군가 이 기록을 보았을 때, 사회생활에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두려움은 막연한 것이었고 실제로 불이익을 겪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낙인이 찍힐 수 있다는 생각은, 진료를 받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이 두려움이 다시 환기 된 건, 작년 성폭력피해자 재판동행지원단 교육을 받으면서였다. 주지하다시피 증언대에 선 성폭력 피해자들은 다양한 질문과 마주한다. 당신은 그 때 어떤 옷을 입었습니까. 그 당시에 술에 취해 있었습니까. 가해자와 연인관계, 혹은 부부관계는 아닙니까. 평소에 어떤 연애를 하고 있습니까. 혹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아는데,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나 또한 피해자들이 질문 받는 병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그 질문을 내 위치로 가지고 오는 일이 가능했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어떤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 당신은 우울증 진료를 받은 적이 있지 않나요. 당신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던 적이 있지 않나요, 라고.

 

 

영화 <피고인>은 집단 성폭력 피해 여성의 법정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식당 점원으로 일하는 켈리는 남자 친구와 다툰 날 밤 술집을 찾는다. 남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던 그녀를 술집의 남성들이 집단으로 성폭행하고, 몇몇 남자들은 이를 부추기거나 방조한다. 담당 검사인 사라는 그녀가 피해자임을 믿지만 법정에서 이기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세 명의 가해자를 폭행 치사로 기소한다. 하지만 타협적인 판결이 켈리의 분노를 풀어줄 순 없었고, 심지어 그녀는 성폭행을 방조한 남자들에 의해 2차 가해에 노출된다. 사라는 그런 켈리의 분노에 공감하고, 성폭행을 부추긴 남자들을 기소해 처벌하고, 더불어 켈리가 성폭행 피해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조디 포스터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작으로 더 유명한 이 작품은 1988년도에 개봉되었다. 무려 20년도 더 지난 작품이지만, 작품에서 그리는 현실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중에서도 내가 주목했던 지점은, 피해자의 자격이 질문되는 부분이었다. 이 질문은 영화의 초반, 검사인 사라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가해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켈리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 사라는, 승소를 위해 배심원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만한 질문들, 켈리가 법정에서 받을 질문들을 미리 던진다. 입었던 옷, 술은 마셨는지, 취해있었는지 등등. 사라의 이 질문을 뒤집으면, 만일 켈리가 술에 취해있거나, 옷을 야하게 입었거나, 남자들과 노닥거렸다면 성폭력 피해를 입증하기 힘들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들은 사라가 우려한 사실들을 배심원들에게 언급하며, 켈리의 성폭력 피해를 부인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성폭력 재판에서 현재도 반복되는 상황이다.

 

 

형사법정에서는 성폭력을 제외하고도 강도, 살인, 사기 등 다양한 범죄가 다루어진다. 하지만 어떤 재판에서도 증인은 평소에 돈을 헤프게 쓰며 자신의 부를 자랑 했습니까라던가 증인은 살해 위협을 받을 당시 격렬하게 저항 했습니까혹은 증인은 사기를 당할 당시 술에 취해있었습니까와 같은 질문으로, 증언의 신빙성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자격을 질문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유독 성폭력 재판에 있어서는 그 자격을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른 범죄처럼, 성폭력 범죄 역시 누구에게나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다. 피해자가 살아온 인생도, 피해자의 성격도, 심지어는 피해자가 앓는 병이나 당시 맺던 관계도, 모두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건 이 후, 피해자가 보이는 반응도 무수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될 만한 사람, 피해자가 할 반응은 정해져있지 않다. 그럼에도 성범죄에서 피해자의 자격을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은, 그 질문이 성폭력 피해자는 마땅히 이러할 것이다라는 통념위에 서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성폭력 운동의 역사는 이러한 통념과 싸워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 싸움을 통해 우리는 그 동안 비가시화 되어있던 성폭력들을 통찰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부강간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하던, 전 애인이건, 심지어 배우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성적인 폭력을 저질렀다면, 우리는 그것을 성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성폭력 피해자들이 부당한 질문을 마주하고, 그 질문 때문에 고통 받는 현실에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었다. 자격이란 없다. 당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든, 그 당시에 어떤 정서적 불안을 겪었든, 당신이 폭력을 겪었다면 피해자로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스스로가 피해자임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부당한 질문에 마주하는 것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영화 <피고인>은 법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때문에 법정 밖에서 성폭력과 관련한 부당한 수사가 오고가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외부에서도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격이 의심되고, 부당한 통념이 재생산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가령 언론을 통해 제기되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식의 선정적인 보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이런 식의 질문과 통념들은 세련된 외피를 두르고 있기 마련이다. 피해자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데 그 질문은 믿을만한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전 애인이라던데, 그 사람을 망가트리기 위해서 이런 사건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지만 피해자가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런 질문들은 단지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명백히 말해, 이는 사후적으로 이루어진 가해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런 것을 ‘2차 가해라고 부른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만약에 내가 어떤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사실관계에 관한 조사가 한창일 때, 누군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 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기반 해 나에게 너는 피해자가 맞느냐라고 질문했다면, 나의 반응은 두 가지일 것이다. 미치거나 우울하거나. 때문에 나는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부당한 질문을 반대한다. 그러한 질문들은 사건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를 파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단지, 비슷한 환경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질적이고, 선정적인 통념을 확대 재생산하며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성폭력 운동이 오랜 시간 해온 문제제기를 역행하는 셈이다. 나는 우리가, 이런 식의 선정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보다, 더 값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이것보다 충분히 정의로운 논의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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